이사주당의 학문의 결실 ‘태교신기’ (용인문화원 발간 '용인문화' 41호-여름호 게재) > 태교이야기

      태교이야기
    태교이야기
    홈 > 태교이야기 > 태교이야기

    이사주당의 학문의 결실 ‘태교신기’ (용인문화원 발간 '용인문화' 41호-여름호 게재)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2건 조회 6,871회 작성일 17-08-24 18:05

    본문

    용인에서 꽃피운 이사주당의 학문의 결실 태교신기

    그 가치와 내용

    박숙현(이사주당기념사업회 회장)

     

     

    1. 용인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이사주당

     

    조선시대 용인을 이끌던 내로라하는 세거문중의 유학자, 정치가 틈에서 분명 여성인 이사주당과 천진을 지키며 살라는 어머니 말씀대로 벼슬길에 오른 바 없는 유희 모자는 주변인이었을 것이다.

    원래 용인지역의 대표적 가문 가운데 하나였던 진주류씨가 모현면에 세거한 것은 중종대에 영의정을 지낸 유순정의 8세손인 진운의 묘소를 일산리에 조성하면서부터다. 그의 아들 수는 좌승지를, 정은 형조참판을 지낼 정도로 가문의 성세를 이뤘다. 그러나 이후 후손 가운데서는 과거급제자가 거의 배출되지 못하다가 시조부 유응운은 행() 안협현감을 지냈고, 시부 유담은 성균 생원에 그쳤다. 더구나 사주당이 혼인(1763)하기 전 을해옥사(1755)에 연루돼 집안이 영락했고 아들 유희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목천현감을 지낸 남편 유한규와 1783년 사별한 사주당은 변변한 호미도 없이 밭을 일굴 정도의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학문을 닦으며 결과적으로 미래를 열 준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주당은 25세에 청주에서 용인 모현의 진주류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여성으로서 83세에 일기를 마칠 때까지 58년을 용인에 살면서 4명의 자녀를 출산했고, 마침내 1800년에 태교신기 저술이라는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그녀 역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실력을 갖춘 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여성이라는 굴레를 뛰어넘을 수 없던 시대적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선비들조차 그녀에게 사사했다고는 하지만, 유학의 큰 흐름 속에서 그들과 함께 시대를 유영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선비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 그것은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자녀를 낳고 기르는 일이었다. 이는 남성들은 도달할 수 없는 별개의 세계로 이사주당은 생명을 만드는 태교를 통해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군자의 이상을 실현해 낼 수 있었다. 태교신기에서 사주당은 열 달을 노력해서 군자의 어머니가 되려하지 않는가라고 태교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태는 성품의 근본이다. 한번 형성되고 난 후 가르치는 것은 끝이다”(21)라든가 음악소리와 맛있는 음식은 예로써 절제했다. 군자는 그 가르침을 미리 해야 한다”(31)라고 했고, 결과적으로 옛 성인 역시 어찌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겠는가. 하고 안함의 차이다라고 했다.(52) 이를 위해 어머니 된 자는 열 달 동안 매사 삼가고 또 삼가야 하다고 했다.

    조선후기에 여성들이 문집이나 실용서를 펴내는 경향이 늘어났다. 그러나 사주당의 저술 작업은 차원을 달리하는 태교 전문서였다.

    태교신기는 내용은 물론이고 당시 태교 전문서를 펴내겠다고 판단한 자체부터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주당에게 있어서 태교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지 않고 욕망하는 마음 전체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인간의 몸을 중시하여 몸의 기원이 되는 태아의 문제를 탐색했기에 그 탐색의 결과 태교신기를 집필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교신기는 태아의 인성 외에 건강과 총명함까지 다루고 있는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특징을 가진 태교전문서다. 과학적 측면에서 봤을 때 초음파 기기와 같은 문명의 이기라고는 없는 조선의 두메산골에서 과학문명이 발달한 서양보다 앞서서 태교책을 저술한 것은 독보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동서양 아무도 태교를 전문 분야로 인식하지 못하던 시대에 그녀는 태교를 독립된 분야로 인식할 정도로 태교의 중요성을 간파했고, 더나가 전문서를 저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점은 시대를 앞선 의학적 식견과 판단력에 바탕하고 있다. 물론 당시 태교와 관련해서 어머니의 몸가짐 등에 대한 단편적 내용이 전해지고는 있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인성과 건강과 총명함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다룬 태교 전문서 사례는 없었고, 당연히 태교신기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조차 없는 독창적이고 실증적인 인문서이면서 과학서였다.

    태교신기에 경서의 인용구가 많다보니 당시 태교이론이 보편화 돼 있던 것처럼 여기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사주당은 태교에 대한 이해를 돕거나 강조하기 위해 기존 경서의 문구를 인용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경서의 인용을 내용적 측면보다 서술 방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 태교신기의 두드러지는 서술 방식 중 하나는 시경, 서경, 논어 등 경전을 빈번하게 인용하고 신독, 경이존심 등 조선 내내 중요하게 거론되던 심성 수양의 개념과 더불어 자작지얼과 같이 두루 통용되는 경계 내지 협박성 인용 또한 활용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경전 인용은 장이나 절에서 자신의 말을 맺을 때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경전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며, 익히 알고 있을 법한 구절이나 개념을 삽입하거나 연상하게 해 설득력을 높이는 효과도 함께 노리는 것이다. , 경전의 인용은 자신의 글에 권위에 의거한 신뢰를 더하고 설득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태교신기를 언문으로 집필하지 않고 한문으로 저술한 이유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태교신기는 부성 태교를 강조한 바 사주당은 당초에 남성까지도 독자 대상에 포함하고 글쓰기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전을 인용해 대개의 남성 문인들의 글처럼 한문 교양을 통한 설득과 논리를 갖춘 글쓰기를 지향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지만 여성의 영역에 한정된 글쓰기가 아니라 남녀의 성별 구도를 넘어 보편적 지식 체계를 구축하려 한 것이라는 점이다.

    아들 유희는 어머니가 한문으로 써 놓은 태교신기를 언해해서 오늘에 전하고 있다. 유희에게 태교신기는 스스로의 삶을 지도한 경전 이상의 서적으로서 절장구(節章句), 석음의(釋音義)’의 성경(聖經)으로서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장구를 분절하고 음의를 해석하는 일은 종래에 경전에 대한 훈고주석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던 것인데 유희는 그것을 모친의 저술에 시도했다.

     

     

     

    2. 태교신기의 의의

     

    태교신기는 아버지의 하루 낳음의 순간부터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에 있어서 태교를 왜 해야 하는 지, 태교의 중요성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17년 전인 조선시대에 현대의학의 내용과 다를 바 없는 과학태교를 주창할 수 있던 것은 이사주당의 학문적 깊이와 실증적 연구 노력의 결과다.

    이사주당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유희(1773~1837)를 비롯한 4명의 자녀를 낳은 경험을 바탕으로 경서에 기반 한 사상과 중국 의서, 그리고 열녀전등의 여성 교양서와 당시의 구전태교 등을 참조하여 태교신기를 집대성했다.

    이사주당에게 있어서 태교신기는 그녀가 평생을 천착해왔던 유학의 최종 결정판이었다. , 그녀는 자신이 평생 공부했던 경서의 내용을 태교를 통해 마무리했다고 볼 수 있다. 군자가 되는 길은 생명의 첫 시작인 태교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서 태교신기 저술은 그녀가 평생 매진했던 유학의 사생아가 아니라 유학의 정수 옥동자임이 분명하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네 명의 자녀를 통해 증명까지 마쳤기에 어디에고 내놓을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유희는 태교신기 발문에서 일찍이 네 자녀를 낳아 길러 체험했는데 과연 너희들의 형체와 기질이 크게 어그러지지 아니하였으니 이 책을 집안에 전함이 어찌 태교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씀을 적고 있다.

    태교신기는 1800년 이사주당이 62세 되던 해에 완성됐다. 아들 유희가 그 다음해인 1801년에 장절을 나누고 언해했으며, 유희의 수고본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3. 태교신기의 내용

     

    태교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인성과 건강함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사주당이 평생을 바라보며 달려온 오로지 한길 유학의 정점은 바로 군자다. 사주당은 11절에서 사람의 성품을 다뤄 태교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최초의 길라잡이임을 강조했다.

    사주당은 태교신기에서 반복적으로 마음 다스림을 강조하는 바, 오늘날 국가가 당면하고 있는 인성교육 문제를 태교로부터 해결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사주당이 태교신기를 펴냄으로써 당시 태교 관련 단편적 지식들이 한권의 단행본에 실리는 계기가 됐다.

    이사주당은 태교의 중요성을 인식, 태교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태교신기는 태교의 가치를 인성에 두면서 이에 그치지 않고 건강과 관련한 다양한 과학적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또 현대 임신부들이 아이의 총명한 두뇌를 기원하면서 실천하고 있는 음악, 미술, 태담 태교 등 각종 실천적 태교법을 망라해서 서술하고 있다. 이사주당은 이 책으로 이미 천재 아들 유희를 낳았으니, 실증을 마친 태교책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교신기는 이사주당의 임신출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증적 과학서로서 당시 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책이다.

    태교신기는 부성태교, 가족태교, 과학태교, 평등성 등 몇 가지 특징을 추릴 수 있다. 여기서 부성태교, 가족태교라고 한 부분 역시 과학태교에 다름 아니다.

    우선, 아버지 태교에 대해 살펴보자.

    아버지 하루 낳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정액의 낭비 없이 건강한 낳음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부부간의 예절을 갖춰 행복한 임신을 해야 함을 강조한 바, 행복한 임신을 했을 때 건강하고 총명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현대 의학에서 연구된 바이다.

    둘째, 가족태교에 대해 살펴보자.

    시집살이가 본격화 된 조선시대에 가족들로 하여금 임신한 며느리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고 했다. 스트레스는 태아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부분으로, 며느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라고 한 것은 매우 과학적인 내용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남녀노소가 태교를 알아야 하며, 이는 오늘날 사회태교로 태교가 확대돼야 함을 의미한다 하겠다.

    셋째, 조용한 환경을 강조, 소음의 폐해를 지적한 바 이는 폐 기능과 양수의 양과 관련한 매우 과학적인 내용이다.

    넷째, 어머니 열 달의 영양 공급이 자식의 평생 건강을 좌우한다고 밝힌바, 평범한 이야기인 듯 하지만 현대 후성유전학이 주목하고 있는 최신 과학태교의 한 부분이다.

    다섯째, 누구나 태교를 하면 훌륭한 군자를 낳을 수 있다고 한 점은 생명을 존중한 평등사상이 아닐 수 없다. 이사주당은 성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며 태교를 하고 안 함의 차이일 뿐, 비천한 자도 태교를 하면 어렵지 않고, 아무리 지혜로운 자도 태교를 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했다.

    그밖에도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현대의 임신부들이 실천하고 있는 태교법이 망라돼 있다. IQ와 창의력, 잠재력 등을 높일 수 있는 음악, 미술, 태담, 독서 태교는 물론 자제력을 길러주는 EQ태교, 인성

    댓글목록

    하단 바
    한국태교아카데미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지삼로 590(삼가동 186-1) CMC빌딩 3F
    전화 : 031-336-3133
    Copyright ⓒ 박숙현의 태교신기 특강 All rights reserved.
    관리자로그인 현대이지웹 바로가기